선물을 받아온게 화근이었다. 별건 아니었다. 예의상 갔던 회식에서 떨떠름한 상태로 받아낸 커프스였다. 드물게 커프스를 하고 다니시길래요, 하고 웃는 여자에게 대강 예에, 하고는 말았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상대방이 손을 내밀 때까지 방치해뒀다가 걷어 차는게 적당하다.
선물을 받아온 이유는 단지 거래처의 중요한 임직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거절하기 힘든 타이밍에 절묘하게 내밀었다. 거절의 말을 하려 입을 열었던 순간 눈치 빠른 여자는 지난번 접대 때 리바이씨만 출장차 대접을 못 받은 게 그래서요, 회사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마세요. 하고 재빠르게 덧붙였다. 거짓말이다. 회사 카드 따위로 긁은 커프스가 백만원을 호가하는 것일리가. 하지만 그렇게까지 둘러 둘러 말하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돌려주는 것도 이상한 모양이었기에 받아왔다. 나중에 조용히 택배로 돌려보낼 요량으로.
최근 학원을 등록한 엘런은 학원 시간이 확 늦어지고 나서 얼굴이 헬쓱해졌다. 바쁜 부모님에게 마중오란 말도 못하고 어린 녀석이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나 되어야 집으로 기어 들어오는걸 알고는 내심 짠해졌다. 그래서 마중을 자처했을 뿐이었다.
단지 시간에 맞춰 차로 데려다주는 것뿐인데도 즐겁게 쉬지도 않고 재잘거리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오늘은요 쪽지시험에서 한 개밖에 안 틀렸어요, 미카사도 아르민도 만점이었는데 저만 한 개 틀리구.. 아, 그걸로 쟝이 놀려서 좀 싸우기도 했고...아직은 서늘한 저녁 공기에 조곤조곤하게 떠들어 대는 목소리가 기분 좋게 섞였다. 차를 대어둘데가 마땅찮아서 좀 먼 곳에 잠시 주차를 해두고 가면 손을 잡아오면서 잠깐만요. 잠깐만 한 바퀴만 산책하고 차타면 안 돼요? 하고 붉은 얼굴을 옆으로 흔들며 물어오는 걸 좀 더 훔쳐보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리바이씨가 아무리 회사일이어도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는 거 싫어요.
저랑은 아직은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이해하지만. 그래도 싫어요거절 하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돌려보낼 거라고 했잖아."
"저는, 싫어요."
"엘런아."
불러 놓고 입을 거칠 문장들을 생각하다 입을 다물었다. 이미 몇 번이고 설명했던 말들을 다시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됐다."
설명하기에도 지친다.오후 열한시 피곤하지 않다고 하면 이상할 시간이다. 관자놀이 살짝 지끈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손을 잡아당겼다. 바로 내치는 손길에 눈을 홉뜨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눈이 너무 당연하단 듯이 마주쳐져서 어이가 없었다.
"병장님."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 귀에 달라붙는다.
"화풀이 하는거냐."
"화내는 거에요"
손을 들어 뺨을 후려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 숨도 조금 거칠어져 있다는 걸 리바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거인이 없는 세상에선 더 좋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훈련은 힘들고, 매일 혼나고,
옆에선 다들 죽어가는 중에도 좋아죽겠으니까. 그랬다고요."
"그래서 지금은 지루해서 하품이라도 나냐?" "다 이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
실없는 소리다 못해 여전히 철부지 같은 소리를 지껄여대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금 애 같다고 생각하셨죠." "그럼 네가 어른이냐." "네, 지금도 그때도 애니까. 지금도 병장님 마음은 모르겠고. 어렵고. 열심히 쫓아가려고 해도 힘들단 말이에요!"
좋은 대학교에 갈래요.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죠. 리바이씨는 좋은 회사 다니니까. 그게 뭔 상관이냐 넌 내가 먹여 살릴 텐데 하자 애매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른다. 이젠 아예 주저앉아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아까 쑤셨던 관자놀이 심하게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주먹을 한 두번 쥐였다 흔들며 돌아섰다.
"오늘은 바래다 주는 거 생략하마."
몇 발자국 딛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미워요!"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이 더더욱 많아지는데도 엘런은 아랑곳 않았다.
"밉다구요. 위에서 올려다보면 좋아요? 나는 매일이 초조하고 빨리 따라잡고 싶은데! 매일 같이 있고 싶은데! 흑심 담긴 선물이나 받아오고! 왜 잘라서 거절 못해요? 할 수 있는데 왜 안 해요! 예나 지금이나 애 취급이나 하고!"
팔을 잡아 일으키자 눈물에 절인 듯 엉망인 얼굴이 들어왔다. 소매로 얼굴을 대충 닦아주고 품에 안으려 하자 확 밀쳐대는 것을 내동댕이쳤다. 서러워서 우는 것인지 아파서 우는 건지 마르지도 않고 눈물을 계속 흘려댔다.
"꼴 사나우니까 일어서." "....안 바래다 준담서요." "맘 바꿨어. 일어서." "싫어요, 혼자갈래요. 얼굴 보기 싫어요." "그만."
팔을 잡고 나직이 최후를 고했다.
"그만해라."
다시 끌어당기자 이번엔 순순히 빨려 들어왔다. 등을 끌어안자 끓는 듯한 울음소리가 막혀서 울려왔다.뭐가 그리 슬퍼서는.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해."
가슴께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애처롭고 여전히 위태로운 녀석. 내심 알맹이는 변치 않았다는 사실이 실은 애달프면서도 기쁘다.
한 번 더 이렇게 만날 운명이었다면 이번에는 같은 시간을 함께하기를 바랐었는데.
너는 내 뭐가 그렇게 좋은거냐. 입안에 맴도는 말을 하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버렸다.
"좋아해요. 많이 좋아한단 말이에요..."
겨우 진정했는지 작아지는 떨림 끝에 조그맣게 덧붙이는 말이 간질간질해서. 힘을 주어 껴안아보자 기어들어가는 한숨소리 끝에 진심이 담겨온다.